공식적으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 라는 건 블라디브스톡~모스크바의 9289키로 구간을 말하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긴 구간이다. 중간에 한번도 안내리고 가면 무려 7박8일이 걸리는 거리. 나의 첫 목적지는 울란우데라는 몽골로 가는 열차가 이어지는 도시였는데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로 68시간이나 걸렸다.

설레임과 기대를 갖고 패기 넘치게 기차에 탔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오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너무 아팠다. 68시간 동안 타야하는 기차를 아직 12시간 정도 밖에 안 탄 상황. 말도 안통하고 기차 안에 갇혀서 어디 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아프니깐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비행기는 모스크바에서 떠난다. 7일이나 기차로 더 걸리는 절망적인 거리.. 도대체 내가 왜 돈 써가며 이걸 하려고 했나 서럽고 후회가 밀려왔다.

다행히도 챙겨 온 약을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씻은 듯이 나아서 다시 즐거운 여행이 되었지만, 만약 낫지 않았다면 중간에 포기하고 비행기표를 새로 구하고 집에 돌아갔을 거 같다. 역시 사람은 혼자일 때 아프면 안된다.


긴 시간 동안 열차 안에서 할 수 있는게 그렇게 많지 않다. 대화를 하던가 책을 보던가 영화를 보던가 창 밖을 보며 멍 때리던가 자던가. 이게 열차 안에서 할 수 있는 전부다. 차창 밖 풍경을 보는 것도 한 두시간이지, 처음엔 감격하다가도 하루라는게 이렇게 길었나 라는 걸 몸소 느끼게 된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기에 이틀 후 부터는 열차안에서 사람 체취와 음식 냄새등 각종 냄새가 섞인 오묘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동행인은 중요한 요소다. 친구와 함께 하면 좋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여행과 마찬가지로 여행 스타일이 맞지 않는다면 원수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싸워도 열차 안에 갇혀 있으니 따로 행동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누구와도 대화를 안하면 하루가 너무 길고 지루하다. 난 초반엔 러시아어를 못하는 관계로 강제 묵언 수행을 했는데, 평소에 말 수가 많지 않은 나 조차 묵언 수행의 어려움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나의 첫 기차 여행의 동행인은 이르쿠츠크에서 해병인 남자친구를 보러 블라디보스톡으로 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분이었다. 남자친구 보려고 왕복 150시간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다니 대단한 사랑의 힘이다.

난 러시아어를 못하고 그녀는 영어를 못하니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4일동안은 동거(?)를 해야하는데 한마디도 안하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강제 묵언 수행의 고통을 느낀 이후로는 손짓 발짓 몸짓 그리고 공책에 그림을 그려가며 대화를 하고, 하다가 지치면 각자 할 일을 하고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틀이 지난 후에 그녀의 핸드폰은 인터넷이 연결되니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대화를 하면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왜 좀 더 일찍 깨닫지 않은건가. 그제서야 우리는 그 때까지 서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이해가 되면서 좀 더 즐겁게 대화하며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기차는 시베리아 벌판을 지난다. 모든 구간에서 핸드폰이 터지면 크게 더 놀라운 것이다. 핸드폰 자판을 치다가 신호가 끊기면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두고 기다렸다가 다시 신호가 연결되면 빠른 속도로 자판을 치며 대화를 했다. 그러다 한번은 그녀가 물었다.

"왜 하루종일 라면만 먹니? 라면이 그렇게 좋니?"

"아니 사실 지겨운데 먹을게 이거 밖에 없어서..."

열차는 중간 중간 다른 역에 멈추긴 한다. 근데 언제 다시 출발 할 지 모르고, 내 짐을 열차 안에 두고 나갔다 오기도 불안해서 난 밖에 나가질 못했다. 그러니 매점도 못 가고 라면이랑 과자를 먹으며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차장실 문에 열차 스케쥴이 붙어 있는 걸 알게 된 건 열차를 내릴 때가 되서 였다.

나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열차가 멈출 때 마다 밖에서 무언가를 사오고 나눠주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생선구이였는데 도대체 어디서 사온건지 도구 없이 그냥 손으로 뜯어 먹으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먹었다. 맥주도 사오 곤 했는데 난 술 마시면 또 컨디션이 안좋아질까봐 사양했다. 사실 열차 안에서 술을 마시는건 금지 되어있지만 러시아는 보드카의 나라다. 차장이 옆을 지나갈 때만 테이블 아래에 술을 숨기고, 지나가면 다시 꺼내서 마시곤 했다. 차장도 사실 알고는 있지만 묵인 되는 분위기다.

그렇게 68시간 후에 열차에서 내렸을 땐, 열차에서 내렸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나도 기뻤다. 열차 안에 갇혀있는게 너무 지겨워서 내릴 때 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착한 울란우데라는 도시가 나에게는 너무 재미가 없어서 곧바로 다시 열차에 타고 싶어졌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지 않아도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하나의 묘미다. 여기선 내가 총 5번의 열차를 타는 동안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얘기해보려 한다.

#설탕사랑

장거리를 가는 열차다 보니 승객들도 다들 이런 저런 음식들을 챙겨오는 경우가 많다. 나야 컵라면이랑 과자랑 물 밖에 챙기지 않았지만, 열차안에선 컵이랑 티스푼을 무료로 대여할 수 있고, 뜨거운 물은 상시 제공되기 때문에 인스턴트 커피와 티백을 들고 타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이 중 대부분의 러시아 승객들이 항상 들고 다닌 물건은 다름 아닌 설탕이었다. 왠만한 사람들이 열차에 올라타자 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방에서 설탕이 든 병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루에 3~4번 정도 커피 혹은 차를 마시는데 그 때 마다 설탕을 컵 안에 부어 넣는다. 설탕물 마시는거랑 별반 차이가 없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언가를 먹을 때도 설탕은 빠지지 않았다. 삶은 계란도 설탕에 찍어먹고 샌드위치에도 설탕을 발라 먹고. 도대체 러시아 사람들의 설탕 사랑의 끝은 어딘가 싶을 정도로 나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흡연

나는 비흡연자로서 일생에 단 한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으나, 러시아에서는 열차가 멈출 때 마다 90%의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줄담배를 피운다. 별로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지만 진풍경이라면 진풍경이다. 간혹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승객들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열차 안은 금연구역이다. 그래서 정차한 역에 선로를 보면 온통 담배 꽁초 투성이다.

#북한사람

러시아의 중간 지점쯤에 위치한 이르쿠츠크를 기준으로 서쪽에서 오거나 가는 열차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동쪽으로 가거나 오는 열차 안에서는 간간히 북한사람들이 열차에 탑승하는 걸 볼 수 있다. 굳이 말하는 걸 듣지 않아도 작고 외소한 체격의 동양인을 보고 단번에 북한사람들이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도 러시아 사람들 처럼 열차가 정차하면 밖에 나가서 줄담배를 피우는데, 평균신장이 큰 러시아인들 사이에 있으니 오히려 눈에 더 띄었던 기억이 난다.

열차 안에서의 그들의 생활은 매우 단조로웠다. 그렇게 대화가 많은 것도 아니고 딱히 러시아어를 잘하는 거 같지도 않았다. 밥 때가 되면 각자 빵과 김치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사실 그들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북한 식당에서 일하는 아가씨들 말고 내가 언제 또 북한사람을 만나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누군가가 그들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괜히 남한 사람이랑 함부러 얘기를 했다고 그들이 나중에 무슨 해를 입을까봐 말을 걸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다. 지쳐보이는 표정과 입고 있는 옷을 보았을 때 아마 러시아의 탄광이나 건설현장에서 파견노동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다음에 또다시 기회가 된다면 그들의 사연을 들어보고 싶다.


#열차 안 사진들

차창 밖 풍경은 멋지긴 멋지다.

자고 있는데 얼굴에 물이 떨어져서 깼더니 창문 틈 사이에서 빗물이 세고 있었다. 2시간 정도를 베개 시트로 창문 틈새를 틀어막고 있어야 했다.

윗침대에 아무도 없으면 남는 담요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차창 밖의 석양.

충전기를 꼽을 곳은 대부분의 열차에선 화장실 앞 밖에 없다. 대부분은 충전하면서 서 있는데 간혹 이렇게 창의적으로 충전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일반적인 열차 안 모습. 러시아 남성들은 키가 큰 사람들이 많아서 대부분 다리가 통로까지 삐져나온다.

모든 열차가 다 같은 건 아니다. 이렇게 최신식으로 깔끔한 열차도 있다.


여행자들이 공유한 러시아 여행에 대한 정보, 경험, 그리고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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