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3. 알혼섬 그리고 바이칼 호수

[러시아] 3. 알혼섬 그리고 바이칼 호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며 방문 한 곳들 중에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바이칼 호수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담수량을 자랑하는 이 호수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알혼섬으로 가는 것이다.

알혼섬은 바이칼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섬이다. 겨울철에는 호수가 얼기 때문에 차를 타고 직접 갈 수 있고, 여름철에는 페리에 배를 싣고 갈 수 있지만, 얼었던 호수가 녹기 시작하는 3~4월은 섬으로 들어가는 것도, 섬에서 나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섬은 사실 황무지나 다름이 없었지만, 그런 섬에 마을을 개척하여 관광지로 만든 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니키타. 이 섬에 정착하여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수도와 전기를 뚫으며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개척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이 섬에서 가장 유명한 곳 또한 "니키타 하우스" 이다.

나 또한 알혼섬에 있을 땐 니키타 하우스에 머물렀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니키타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 소비에트 탁구 챔피언이었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 그는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내가 일본어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나를 볼 때 마다 외쳤다.

"겡끼데스까!!!!! (잘 내지고 있습니까)"

그럼 난 대답했다.

"하이 겡끼데스요!!!!!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수건 하나만 들고 차가운 호수에 수영을 하러 가실 정도로 힘이 넘치던 할아버지다. 아직도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다.


니키타를 보러 니키타 하우스에 가는 것도 좋지만, 이 곳에서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행자들이 있다. 주중에는 다들 각자 돌아다니다가도, 숙박비에 포함되어 있는 조식과 저녁을 먹으러 시간이되면 다들 식당에 모이는데, 그때마다 여러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이 당시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날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더욱 흥미로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자는 호수 주변을 산책하고 있을 때 만난 러시아인 A군이다.

호수를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싶어서 바위 산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사진 좀 찍어줄 수 있니?"

그의 카메라를 받아 들고 사진을 몇장 찍어주었지만 곧 베터리가 다 되서 카메라는 꺼지고 말았다.

카메라를 돌려주며 그에게 말했다.

"베터리 다 되서 카메라가 꺼졌어"

"어쩔 수 없지 뭐. 근데 너 영어 잘하네? 어느나라 사람이야?"

"난 한국 사람. 너는?"

"나는 노보시비리스크 출신인 러시아인이야!"

오.. 영어를 잘하는 러시아인을 처음 만났다. 후에 러시아 서쪽 도시에 갔을 때는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동쪽에서 온 나는 영어를 잘하는 러시아인을 만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감탄하고 있는데 그는 말했다.

"나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한국에 있었어!"

"뭐? 진짜? 어디 갔다 왔는데?"

그러자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블라디보스톡까지 히치하이킹으로 가서 거기서 부터 비행기 타고 인천으로 간 다음, 서해안 따라 히치 하이킹 하면서 부산까지 갔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히치하이킹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야."

"한국에서 히치하이킹으로 다녔다고??? 한국말은 할 줄 알아??"

"아니 안녕하세요 밖에 할 줄 몰라. 근데 한국 사람들 다들 친절하고 잘 태워주던데?"

한국에서 히치하이킹이 가능하다니. 그것도 한국어 한마디도 못하는데.. 38선만 넘는게 가능했다면 비행기 안타고 히치하이킹으로 북한을 통해 남한으로 들어왔을 거 같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그는 기타치고 노래 부르며 여행 경비를 벌면서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간밤에는 호숫가 근처에서 탠트치고 불피워서 감자 구워 먹고 잤다고 한다. 뭔가 낭만적이어서 이 말 듣고 다음 날 저녁에 석양을 보러 호숫가로 내려갔는데, 내려가자마자 엄청난 양의 날파리들이 바지에 들러 붙어서 식겁하며 다시 올라 온 기억이 있다.

그렇게 바위 산을 내려오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는 히치하이킹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나 물어볼 질문을 그에게 던져봤다.

"근데 히치 하이킹 위험하지 않아?"

그러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며 그는 답했다.

"응? 왜 위험하지? 하나도 안 위험해~ 너도 한번 해봐!"

음.. 한국이야 세계에서도 치안이 좋은 나라로 꼽히는 나라고 너는 러시아인이니까 러시아에서 히치하이킹해도 무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 산을 다 내려온 뒤 오늘은 어떻게 할 거 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말했다.

"오늘 하루 더 있다 갈까 고민했는데 볼 거 다 본 거 같아서 이제 다시 히치하이킹으로 이루쿠츠크에 돌아가려고. 만나서 반가웠다!"

그리고 그는 유유히 떠나갔다. 나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동갑인 그의 뒷 모습이 정말로 멋져보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난 알지 못했다. 추후에 나도 그러한 여행을 하게 되리 란걸.


바이칼 호수를 보러 굳이 알혼섬 까지 오는 이유는, 이곳에서 보는 호수의 경치가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섬의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며 호수의 여러가지 모습을 볼 수 있는 투어를 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저녁에는 선셋 투어라고 해가 질 시간에 맞춰서 배를 타고 호수 위를 유람 하는 투어도 있는데, 내가 있는 동안은 투어를 신청하는 인원이 적어서 매일 캔슬 됐었다. 한국에서 여행사를 하다가 여행이 좋아서 작가로 전업 한 '이지 러시아' 라는 가이드 북을 쓰신 작가님이 선셋 투어 못가서 아쉬워 하던 모습이 기억 난다.

선셋투어 말고 섬의 남부 투어와 북부 투어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부 투어를 선택한다. 어차피 이루쿠츠크에서 알혼섬의 중심부에 있는 이 마을까지는 남쪽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보지 못한 북부 투어를 선택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투어는 러시아산 봉고차인 '푸르공'을 타고 진행된다. 승차감은 별로지만 힘도 좋고 차량 구조가 단순해서 험난한 지형을 다니다가 고장나도 수리 하기가 간단한 것이 장점이라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이 차를 타고 간다는 건 곧 험난한 지형을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키타 아저씨가 섬에 작은 마을은 개척했지만 길 까지 개척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 섬에 포장도로는 단 한군데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섬의 지형은 평평 하기 보다는 업앤다운이 심한 지형이다. 그런 곳에서 가이드와 요리사를 겸하는 운전사 아저씨가 분노의 질주를 시전하기 때문에 투어 참여자들은 이동하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피로가 쌓인다.

얼마나 힘든지, 차를 타고 이동할 때에 사람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지쳐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차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면 다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바이칼 호수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다가도 다시 이동할 때가 되면 다들 표정이 어두워 진다.

추후에 열차 안에서 만난 홍콩 여행자들은 이 투어보다 몽골 고비 사막 투어 때 탄 푸르공이 훨씬 더 힘들다고 했다. 나중에 나도 고비 사막 투어를 가봤지만, 개인적으로 흔들림과 난폭한 운전의 임펙트는 알혼섬의 북부 투어가 압승이다. 고비 투어도 흔들림이 심하지만 흔들림 보다 긴 이동시간이 더 힘들다.

힘들지만 이 투어가 만족스러운 이유. 그건, 운전은 난폭하지만 성격은 착한 러시아어 밖에 못하는 가이드 겸 요리사 아저씨가 바이칼 호수에서만 잡히는 생선을 이용하여 만들어주는 맛난 특급 점심 식사. 그리고 섬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호수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혼섬에서의 마지막 날. 이루쿠츠크에서 이곳으로 오는 봉고차 안에서 만나 이 섬을 떠날 때 까지 동행하게 된 중국인 B군과, 숙소에서 만난 또 다른 중국인 C양과 함께 호수 너머로 지는 해를 보러 갔다.

B군이 중국에는 바이칼 호수에 관한 노래가 있다며 그 노래를 틀고, 우린 석양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여행 얘기 그리고 인생 얘기를 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 덧 해가 지고 무수한 별들이 하늘을 수 놓고 있었다. 섬엔 가로등이 별로 없기 때문에 밤이되면 별이 참 잘 보인다.

그러다 갑자기 C양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꿈이 뭐야?"

그 질문을 듣고 B군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시인이 되서 노벨상을 받는 거야"

중국에서 미국계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B군에게 이런 꿈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당하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 멋져보였다.

이 당시의 나의 대답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난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맛난 걸 찾아 먹을거야"

이 대답을 하고 난 3개월 후, 난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고, 그 후 한달이 지난 뒤 배낭 하나만을 들고 그 꿈을 이루러 떠났다.

그리고 2년 동안 꿈 속에서 살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 온 지금. 분명 하고 싶은 것들은 많았는데, 30대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헤매고 있는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물어본다.

'나의 꿈은 뭘까?'


섬과 호수의 사진들

 
배에 차를 싣고 알혼섬으로 건너간다. 겨울엔 호수가 얼어서 차로 그냥 건너가면 된다고 한다

섬은 대부분 허허벌판이다

미래의 노벨 문학상 후보 B군

음악하는 히치하이커 A군이 떠나가는 모습

니키타하우스의 마당

최고의 이동수단 푸르공

호수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안가는 바이칼 호수. 파도 치고 있지만 담수라 마실 수 있다

여인과 호수

사이좋은 커플과 호수

절벽 너머의 호수를 향해 가는 사람들

해질녘의 샤먼들의 제단. 실제로 샤먼들이 저기서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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